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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번째의 너 Prologue87번째의 너 2021. 8. 23. 00:14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날이 끝나갈 때 타오르며 포효해야 하니
빛이 사그라드는 것에 분노하고, 분노하세요."
적막함을 깨고 아침 교양 프로그램에서 잔잔한 성우의 미성을 타고 시 한 구절이 흘러나왔다. 평화로운 아나운서의 미소와는 달리 체리는 교복 치마의 지퍼를 주욱- 잠그고는 서둘러 문 밖으로 향한다. 혹여나 지각하진 않을까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다.
'오전 8시 16분'
교문 잠기는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마음에 체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곤, 이내 가방끈을 꾸욱 쥐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침도 거른 공복 상태로 힘껏 달리려고 하니 다리에 힘이 잘 안들어갔지만, 한 번 더 지각하면 한달 동안 교무실 근처의 가장 냄새나는 여자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한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체리는 이를 악 물고는 학교를 향해 뛰었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내쉬면서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8시 25분'
늦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짧은 숨을 포옥 내쉬고는 어느덧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내며 제 앞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인영에게 씩 웃으며 체리가 다가갔다. 그러고는 가볍게 점프하면서 어깨동무를 했다. 갑작스러운 어깨동무에 기우뚱하던 몸을 바로 세우고 휙 고개를 돌린 인영은 가빈이였다. 체리는 밝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인사하였다.
"야, 한가빈! 너도 이제 가냐"
제게 어깨동무한 사람이 체리임을 확인한 가빈이는 조금 굳었던 표정을 풀고는 하이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아침에 늦잠을 좀 자느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 대답한 체리는 가빈과 나란히 신호등 앞에 서서 초록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던 참이였다.
그때 횡단보도 근처 상점가 TV에서 뉴스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속보입니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전염된 수인들이 금호 평야 일대에서 속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현재 이상행동과 공격성이 강한 모습을 보여서......."
"단챙! 신호 바꼈다! 가자~"
가빈은 이내 체리의 팔짱을 끼곤 횡당보도를 걷기 시작했다. 체리는 뉴스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가빈의 재촉에 한발 느리게 행동하며 따라갔다. 그런 체리의 모습에 가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니..그냥 뭔가 저 뉴스 좀 신경 쓰여서...."
가빈은 그녀의 말에 짐짓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도 단호해보이지 않았다- 체리에게 말했다.
"아~ 단체리! 너 무서워? 걱정마, 이 언니가 다 지켜줄게!!
나 샴고양이야!!!"
체리는 그녀의 말에 실 없는 웃음을 픽 흘리며 벌레 한 마리도 못 잡는 애가 퍽이나 지키겠다! 라고 말하며 가빈을 놀려댔다.그에 발끈한 가빈이 입을 떼려고 한 순간, 어디선가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와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참에 가빈이의 비명 소리가 체리의 귓가에 선명히 박혔다. 가빈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체리는 정신을 잃었다.
체리가 퍼뜩 눈을 떴을 땐 고요한 집에서 아침에 틀었던 교양 프로그램이 TV에서 나오고 있었다."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날이 끝나갈 때 타오르며 포효해야 하니
빛이 사그라드는 것에 분노하고, 분노하세요."
아나운서의 고운 음성을 타고 아까 들었던 시의 구절이 똑같이 흘러 나왔다. 체리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혹시 꿈을 꿨나?'
그러다가 시계를 확인한 체리는 어쩔 수 없이 가방을 다시 들춰매고 문 밖으로 나섰다. 묘한 기분과 혼란스러운 기억을 안은 채 학교로 뛰어갔다. 체리가 확인한 시간은
'오전 8시 16분'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 상황이였지만, 꿈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그냥..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자꾸만 불안감이 엄습해왔기 때문이다. 체리는 단순히 학교를 지각할 까봐 그런거라고 믿고 싶었다.
'오전 8시 25분'
체리는 제 손목 시계가 잘못된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시간이 아까와 이렇게 똑같은 걸까?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시선을 돌렸을까-
그 앞에는 가빈이가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체리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다시 한번 아닐거야- 라고 생각하곤 가빈에게 뛰어갔다. 체리는 가빈의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인사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가빈은 체리임을 확인하고는 이내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체리야! 너도 이제 가는거야?"
"응, 그렇게 됐네"
"그럼 같이 가면 되겠다!!"
다행이다. 대화가 달라. 체리는 그저 잠시 이상한 꿈 같은 현상이였던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안도하면서 가빈과 함께 학교로 항하는 횡단보도에 섰을 무렵,
"속보입니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전염된 수인들이 금호 평야 일대에서 속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현재 이상행동과 공격성이 강한 모습을 보여서......."
체리는 화들짝 놀라며 뉴스가 나오는 상점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가빈은 그저 눈만 꿈뻑댔다. 체리는 갑자기 식은 땀이 흐르는 기분이였다. 제 기억이 맞다면, 분명 이 다음에는.......
"체리야?"
가빈이 죽을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괴이한 것에게-
체리가 가빈의 손목을 낚아 채고는 학교의 반대편으로 가려고 했다. 가빈은 돌발 행동을 하는 체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지각할거라며 때 마침 불이 들어온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했다.
"왜 이래, 단체리!! 우리 학교 지각해!!!"
"시간 없어, 나중에 설명 해줄테니까 그냥 따라오..."
그때였다. 찢어질 듯 소름끼치는 비명소리.
체리는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체리는 그 비명이 기폭제라도 된 듯 더욱 거칠게 가빈의 팔을 이끌고 소리의 반대 방향으로 갔다. 아니, 가려고 했지만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괴이한 것이 가빈의 멱살을 잡아 채었기 때문이다. 가빈은 체리의 손을 놓았다. 체리는 놀라서 가빈을 쳐다보았지만, 가빈은 눈물을 잔뜩 머금은 채 덜덜 떨면서 말을 꺼내려는 순간.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면서 듣기 싫은 피부가 뜯겨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전 처음 듣는 끔찍하면서도 생경한 소리와 광경에 체리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도.....망가.....흐끅..!"
이미 목덜미가 절반 넘게 뜯겨 그 곱던 목소리가 쇠 긁는 끔찍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곤 이내 팔을 추욱 늘어트렸다. 그 기이한 것은 가빈을 짐짝처럼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겨쳤다. 가빈이라고 더 이상 형용할 수 없는 시체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체리는 그 모습에 주체할 수 없는 공포감에 사로 잡혀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도저히 수인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비틀려진 목을 체리에게 돌렸다. 듣기 싫은 뼈 부딫치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박혔다. 이리 저리 뒤틀려지는 뼈에 피부가 이겨내지 못하고 찢어지고 그 사이로 뼈가 툭툭 튀어나와 아주 기괴했다. 또한 본래의 피부 색은 찾아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체리는 굳은 몸 상태로 눈물만 잔뜩 쏟아냈다.
"아....아..."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고는 정지된지 오래였다. 그저 달달 떨면서 죽음의 순간을 기다릴 뿐. 가까이 온 그것에게는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났다. 체리는 토기가 울컥 밀려왔다. 그 괴이한 것은 체리가 바들 바들 떨어대는 모습을 보고는 씨익- 송곳니를 들어내면서 웃었다. 그의 입가에는 채 마르지 않은 혈흔들과 살점들이 잔뜩 엉겨 붙어 있었다. 그것이 턱 턱 막히는 기괴한 웃음 소리를 내다가 입을 크게 벌렸다. 체리는 눈을 꽉 감았다. 콰직- 밀려오는 고통과 함께 체리는 정신을 놓았다.
작가의 사담
맨 앞의 시 구절은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차용한 부분입니다.
생각보다 1편이 많이 길어지기도 했고, 조금 잔인한 부분도 많이 나오는 것 같네요...앞으로의 전개를 위해서는 필연적인 장면이였기 때문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포칼립스물이라 피폐는 기본이고든요ㅠ
남주들은 빠르면 다음화, 아니면 2화부터 나올 듯 하네요!
그럼 다음 편에서 봐요~'87번째의 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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